2019.02.07 01:31

산호세 김권사님

O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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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세 김권사님

김권사님과 여러 가지 추억이 있지만 내가 산호세의 침례교회에서 마지막 7년은 홈리스로 교회를 다니면서도 십 년 이상 하던 성가대도 그만 두지 않고 계속했었다. 교회의 극진한 은혜로 가든그로브의 어머니집에 와서 홈리스를 그만 두기까지 3년을 더 성가대를 했다. 하지만 홈리스라고 쉬쉬하고 몇 분을 빼고는 아무도 돌아보거나 집으로 초청해서 식사를 하자고 안하고 대부분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김권사님은 자기가 머무는 조카의 집으로 오라고 해서 차도 없고 홈리스인 나는 몇 시간을 걸어서 김권사님 댁을 방문을 했다. 갔더니 정원의 일을 시키시고 맛있는 점심도 주시고 특별히 씹히는 맛이 나라고 무를 썰어서 완전히 절이지 않고 도중에 적당한 본인만 아는 시간에 꺼내서 속을 넣어서 만든 깍두기도 자랑하시고 주시었다. 물론 용돈도 주시었다. 그 때 당시 80이 넘으신 권사님과 종종 얘기를 했는데 어쩌다가 내가 사투리가 재미있어서 철이 없는 나는 권사님과 농담을 해버렸다. "권사님 사투리가 재미 있네요. 시골에서는 애기를 낳는다고 안하고 놓는다고 그러죠? 말할 때 조심해야겠네요?"라고 했다. 또 한 때는 속옷을 "속곶"이라고 발음하시고는 그 연세에 갑자기 얼굴에 붉어지셨다. 신앙이 얼마나 좋으시면그 연로하신 분이 시편의 92 14절의 말씀대로였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

      김권사님은 백세가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양로병원에서 내 기억으로는 5년 이상 누워계셨다. 김권사님의 딸이신 분이 나한테 찾아와서 "의사가 그러는데 어머니가 음식을 못 드셔서 배를 뚫어서 음식을 공급하는 호스를 연결할지 말지를 나보고 결정하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넣으려고 배에다가 구멍을 뚫지 마시고 편하게 권사님을 보내드리세요."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알았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더니 몇 주 후에 또 만났길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는 의사보고 뚫으라고 해서 살아계시다는 것이었다.  근데 그 얼굴이 누워계신 어머니보다  더 슬퍼 보였고 소망이 없는 게 불쌍해서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머니를 위한 조치가 아니고 그 딸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밖엔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그분의 체면을 위해서 본인 앞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고령의 권사님과 거의 30년 정도의 친분이 있었고 북가주의  산호세에서부터 그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가주에서 홈리스로 살다가 모든 사람과 인연을 끊고 소식도 알리지 않고 남가주로 이사를 온 후에 몇 년이 흐른 후에 그 김권사님이 오렌지카운티의 딸의 집으로 오게 되었는데 후에 얘기를 들으니까 그 권사님이 산호세에서 내가 사라진 후부터 나의 이름을 노래를 부르듯이 자주 부르시고 나의 행방을 알고자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 관해서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김권사님의 여러 딸 중에 가든그로브에 사는 딸이 노후의 말년의 간병을 자원해서 이사를 오시게 되었다. 그 권사님은 산호세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렌지 카운티의 딸집으로 오게 되었는데 라이드가 필요하게 되어서 가든그로브의 한인 커뮤니티에서 일하시는 나의 큰누나와 우연히 연결이 되어서 누나가 라이드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모시고 오는 중에 또 이 김권사님이, 사투리로 "아니~ 오렌지카운티로 수 년 전에 이사온 최맹화니라는 사람을 아시나요?"라고 우리 누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누나가 깜짝 놀라서 "어머! 그 사람이 바로 내 동생이에요!"라고 정색을 하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김권사님과의 인연이 다시 연결이 되었다.

      그리하여 또 근 십 년 동안 그 집을 드나들면서 그 권사님을 뵙고 문병을 가게 되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그분을 뵙고 전에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분은 교회를 끔찍이 사랑하시고 기도하시고 걱정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개척하시고 큰 교회로 일구어놓은 담임목사가 원로목사가 되어서 사임하시고 어지러운 가운데 교회를 김권사님이 떠나시어서, 늘 하시는 말씀이, "아이고 우리교회 다 망해 먹었다."하고 슬퍼하시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시자, 간병하던 딸도 못 알아보시고, "아니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잘 모르는 분이네요"라고 하시기 시작했다. 근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랑 같아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말해야겠다.) 그렇게 딸도 몰라보시는 분이 내가 가면, "최맹화니 왔구나."라든가 "맹화니네!"라고 알아보시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눈에 눈물이 약간 고인다.) 그래서 나는 적지 않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내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주안에서 불초 소생의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는 권사님의 은혜가 감동적이어서 오랫동안 나를 흐뭇하게 했다.

      그 분이 병세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집에서는 돌볼 수가 없어서  양로병원으로 옮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을 그 권사님을 방문하게 되었다. 헌데 그 분이 나조차도 몰라보기 시작하셨다. 나는 섭섭하기 시작했다. 물론 투정이 섞이기도 했겠지만 약간 서러운(?)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시고 기뻐하시는 은혜가 그리워서, 나는 전에 같은 교회에서 찬양대를 수십 년을 섰으니까 내가 찬양을 크게 불러봐야지 그러면 내가 기억이 나실 거야 하고는 찬송가를 꺼내서 서너 장 부르기 시작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누워계신 침대 옆에 앉아서 찬송을 하나님께 올렸다. 그랬더니 과연 찬송 중에 좀 반갑기는 하나 좀 탐탁지 않다는 어조로, "아니 누군가 했더니 맹화니구만~"라고 하셨다. 그래서 마음이 또 기뻐졌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조금 귀찮게 해드렸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만해도 나는 아주 순수하고 뜨겁게 믿음생할을 한 게 떠오른다. 갑자기 요한계시록 2 4절과 5절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2 12절의 말씀과 함께, 이 두 말씀을 놓고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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