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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사람 길들이기

나는 늦게나마 나의 깊은 속사람을 보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약을 먹어서 일까?  아니면 새벽기도를 매일같이 5년 이상 드려서 그럴까? 나의 속에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안에 어떤 사람이 있는 것이었다. 근데 그것이 사람이 아니고 아주 어린 아이이다. 그것이 무엇을 하냐 하면 내 속 깊은 곳에서 아주 장시간 동안 흐느껴 울거나 화가 나있다. 언제 멈출지도 모르고 언제 시작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영의 깊은 곳을 드려다 보면 느끼게 된다. 근데 그것이 나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이다. 하루를 온종일 화가 나있게 하거나 울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이 속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몇 년 동안 계속되더니 최근에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를 통해서 차츰 이 속에 있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오랜 관찰과 연구 끝에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귀신이 들린 줄 알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아무리 명령해도 나가질 않아서 예수님도 무던히 원망했다. 그래서 나의 속의 이 사람이 하는 짓과 성격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할 때는 좋으나 세상에 나가서 내가 부당하게 대접을 받거나 내가 누구에게 바라고 위로를 구할 때에 얻지 못하면 울기 시작하거나 화를 내서 누군가가 달래줄 때가지 또 위로를 얻을 때가지 계속 되는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해서 부모와 누나들에게서 어렸을 적에 들은 말이 없다면 나의 이 속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을 것이다. 나는 세 살 전까지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울고 불고 한다고 했다. 그 정도가 아니고 지나쳐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울고 발버둥을 치다가 기절을 한다고 했디. 아마 모르긴 해도 눈을 뒤집고 까무라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이 속에 있는 어린애가 나인 줄 아는 단서가 되어서 이것이 나의 속사람이라는 바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의 이런 지랄 같은 성격 때문에 내가 다치거나 아플까 봐  혹은 그 책임을 지기 싫어서 아무도 나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자라서야 이것도 저것도 배우고 해서 표면적으로는 멀쩡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갇혀있던 나의 속사람이 기도인지 약인지를 통해서 나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차근 차근 기도를 통해서 내 속에 이 어린아이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을 요구하다가 들어주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도 육신을 입어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야 하고 시간을 들여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나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것 사실도 모르고 자꾸 나의 요구를 거절한 대상만을  탓하고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광폭하게 온갖 다 죄를 지으면서 말이다. 그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결국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현저히 못 박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설교자들이 말하는 속사람 아담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나의 속사람을 교육할 것이 수도 없이 많다몇 가지 예를 들면 무엇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공급을 받으면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기를 힘쓰게 가르친다. 그리고 상대방이 거절을 하면 공손하게 물러서는 예의를 가르친다. 그렇지 않으면 아벨을 죽인 가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시기심의 깊은 곳에는 바로 가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나의 속사람의 교육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는 성경말씀에 희망을 걸고 오늘도 나의 영혼을 말씀으로 교육한다. 이것이 어쩌면 사도바울의 자신을 쳐서 복종하는 것이요 십자가를 지고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요. 또한 경건의 연습이라고 생각된다.